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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조난 그 자취(1936년 최초의 조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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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조난 그 자취(1977년 서재철 기자가 쓴 신문기사를 정리함)

1. 1936년 일본 경성제국대학산악부 마애가와도시하루

한라산이 인간에 의해 정복되기는 아주 오래 전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李朝이전에도 공식적인 등반이 아니더라도 정상을 올랐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한라산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일본 경성제대(京城帝大) 등반대의 조난사고 이후 일 것이다. 당시 일본은 본도에 중국대륙 폭격 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의 한라산 등반이 일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 경성제대산악부 마애가와(前川智春)의 조난사고이후 많은 국내외 산악인들이 한라산으로 눈길을 돌려 올라보고 싶어 했으나 해방이 될 때까지는 오를 수가 없었다. 8.15해방과 함께 38선이 생겨 국토가 양단된 후 금강산 등 북한의 산도 못 오르게 되자 산악인들은 한라산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한국산악회 적설기 등반대가 조직되어 미국인 3명등 19명으로 대원을 편성, 해방이후 처음 등반을 실시했었다.

이 등반대는 「제주도풍토기」를 영화로 만들어 큰 성과를 올리는 등 한라산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 1948년에 한국산악회 제2차 한라산 적설기 등반 도중 폭설로 田鐸(전탁)대장이 목숨을 잃어 또 한번 국내산악인들을 놀라게 했다. 두 베테랑급의 산악인의 조난사고가 일어났고 특히 전탁씨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조난자가 되어 한라산은 산악인들에게 호기심을 끌기도 했다. 이런 중에 본도에는 48년 4.3폭동으로 등반이 막혔다가 1954년 9월21일 한라산등반이 전면 해제된 이후 작고큰 조난사고가 일어나 많은 인명피해를 이런 조난사고를 연대적으로 역어 본다 ①경성제대산악부 마애가와 도시하루(京城帝大山岳部 前川智春) 조난(1936년) 前川씨의 조난사고는 한라산에서의 첫 조난사고이다. 이 등반대는 대장 천청일 씨등 9명으로 조직된 베테랑급의 등반대로 금강산은 물론 적설기 백두산 관모봉 등 북한의 고산을 거의 오른 팀이며 조난 당한 마애가와 씨는 금강산 선인봉 제3코스 초등자이기도 하다. 이 팀의 대장인 천정일 씨는 적설기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사전답사차 혼자서 35년 2월에 제주에 와서 한라산을 올랐었다. 천정일 대장은 「한라산은 월세계와 같은 신비감을 느꼈고 제주의 첫인상은 너무 강렬했다」고 후일 그의 저서에 남겼다. 그가 시에서 관음사까지 차편을 이용하여 산을 오르고 있을 때 산에서 만난 한 촌노(村老, 이는 山村人으로 부름)가 이미 설피를 신고 사냥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동계의 미지의 세계가 점차 눈앞에 나타나자 어떻게 해서든 등반을 해야 되겠다는 의욕이 강하게 솟구쳤다. 천정일 대장은 한라산 적설기 등반을 위해 기상 등을 조사하였고 훈련으로 백두산 관모봉과 금강산에서 훈련을 마쳐 1935년 12월부터 36년 1월까지 경성제대산악부(京城帝大山岳部) 적설기한라산등반대가 조직되었다. 한국내의 어느 산보다도 기상변화가 심하고 특히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불어 폭설이 내린다는 기상조사를 세밀히 마친 이 등반대는 사전에 제주영림서(濟州營林署)에 협조요청을 하였다. 당시 영림서에서는 이 등반대를 위해 용진각(勇進閣)부근에다 「개미등 小屋」을 지어줬었다.

12월하순에 등반대가 제주에 도착하였을 때 한라산에는 상당한 적설이 쌓여 있었다. 이 등반대는 무지개 등반을 실시키로 하여 1936년 1월1일 정상에서 합류키로 하고 고교팀은 서귀포코스로, 경성제대팀은 관음사-개미등-정상을 오르기로 결정하였다. 관음사에 짐을 옮겨놓고 천정일 대장이 정찰에 나섰는데 이때 적설을 이용하여 노루와 토끼를 사냥하는 산촌인(山村人)을 보고 이들 3명을 포터로 기용했다.

1935년 12월30일.
평균적설량이 1m가 넘고 가끔 후려치는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관음사를 출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스키를 이용한 9명의 대원들은 운행하기가 쉬웠으나 설피를 신은 포터들은 가슴까지 빠지는 눈속을 헤치며 겨우 개미등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곳도 평균 2m의 적설이 쌓여 있었다. 일단 개미등 소옥(현재 용진각 부근)에 도착하자 포터들을 돌려보내고 이 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해 산에서의 첫 밤을 지냈다.
산장은 적었으나 나무 향기가 무척 좋았으며 산장에서의 해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해가 지는 고향」이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다.

1935년 12월31일.
어제의 궂은 날씨와는 달리 거짓말과 같이 날이 걷히었다. 전대원은 눈앞에 펼쳐진 한라영봉의 신비에 어쩔 줄을 몰랐다. 천정일 대장은 「각종나무는 눈아가씨의 형태를 이뤘고 하늘의 색채와 주변의 설경은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예술」이라고 후일 그의 저서 「山넘어 또 山」에 남겼다. 전 대원은 스키를 신고 백록담에 전진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왕관능코스를 올랐다. 깊은 분설로 가슴까지 눈이 빠졌으나 왕관능 능선에 펼쳐진 부악(釜岳)의 조망은 세계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경관이라 전대원은 지친줄도 몰랐다. 일보일보 다가설수록 나타나는 눈쌓인 백록담의 신비에 가슴 설레이며, 마치 인간에 의해 첫 정복되는 山마냥 조심스레 동릉(東陵)에 올라섰다. 대원들은 당장이라도 정상을 오르고 싶었으나 내일 고교팀과의 정상 랑데뷰를 위해 화구(火口)로 내려갔다. 화구벽의 눈은 크러스트가 됐었다 텐트를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짐만 놔두고 개미등 소옥으로 내려와 그날 밤 즐거운 세모의 밤을 즐겼다. 대원들은 낮에 본 신비의 세계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936년 1월1일
어제와는 달리 구름이 내려 깔려 날씨가 잔뜩 찌푸렸다. 천정일 대장은 「역시 변화가 심한 산이로구나」라는 한마디뿐. 해가 뜨기 전 출발했다. 왕관능을 올라서서는 전원이 아이젠을 착용하고 안자일렌을 하여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이 가까울수록 눈을 크게 뜨고 남쪽으로 올라올 고등부팀을 찾으며 정상을 올랐으나 그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정상에 올랐다. 서남쪽 하늘엔 햇볕이 비쳤으나 정상쪽에는 눈보라를 일으키며 강풍이 몰아쳤다. 정상정복의 즐거움을 채 맛보기도 전에 전대원은 백록담으로 내려와 텐트를 쳤다. 그날 밤은 服部, 前川, 佐○, 3명의 대원이 비박(非拍)훈련과 바람이 센 백록담에서 기상관측 및 텐트의 내풍시험도 실시할 예정이었다. 3명의 대원만 남기고 개미등 소옥으로 하산한 후 식량지원을 위해 또 3명의 대원을 백록담으로 보냈다. 기상은 계속 악화되어 취설(吹雪)이 능선상에서 광란하고 있었으나 계곡속은 너무나 조용했다. 산장주변엔 어둠이 깔렸으나 식량지원을 떠난 3명의 대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8시가 지나자 불안했다. 천정일 대장은 伊○ 대원과 왕관능으로 마중을 갔으나 3명의 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광풍이 몰아쳐 해드램프 불빛이 떨렸다. 소리를 지르며 능선을 오르고 있지만 취설풍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화구벽에 다다랐을 때는 바람에 몸이 날려 스키를 이용하여 킥스텝으로 화구벽을 내려갔다. 텐트를 향해 소리를 질렀으나 대답이 없자 천정일 대장은 수간 불안감마저 느꼈다. 텐트의 문을 열어보니 6명의 대원들이 찢어진 텐트를 움켜잡고 있었고 폴대마저 부러져 있었다. 백록담에는 매초40m가 넘고 짧은 간격으로 몰아쳤다. 지원대 3명은 하산할 예정이었으나 왕관능 부근에서 길을 못 찾을 것 같아 텐트 속에 머물렀던 것이다. 계속되는 강풍에 눈까지 때렸고 좁은 텐트속에는 8명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천정일 대장과 伊○대원은 베이스 가기 위해 빽코스 하였으나 심한 바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바람과 싸우며 왕관능에 도착하였을 때 내려가는 길을 잃어 한참동안 방황하던 중 산장에서 가물거리는 불빛을 발견하여 불빛 따라 겨우 산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1시가 넘었다. 그날 밤 산장이 날아갈 것 같은 강풍과 폭설로 백록담 전진캠프의 대원들이 걱정스러워 잠을 못 이뤘다.

1936년 1월1일
바람도 개었고 약간의 눈이 내렸으나 안개가 잔뜩 끼어있었다. 너무나 조용한 아침이어서 불길한 예감마저 느꼈다. 3명의 대원은 빈몸으로 1시간 조금 더 걸려 백록담 전진캠프에 도착했다. 다행히 6명의 대원은 무사하여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어젯밤 강풍에 무척 고생했는지 피로한 듯 해 보였다. 약간의 장비와 식량을 남기고 밤을 샌 6명의 대원들은 빈몸으로 佐○대원을 써브리더로 하산을 시작했다. 무풍상황에서 왕관능에 도착한 천정일 대장은 먼저 내려와 왕관능에서 산장으로 빠지는 길목 자작나무에 삼각 표지기를 달아놓고 한발 앞서 산장에 도착하여 불을 피워놓고 차례로 돌아오는 대원을 맞았는데 최종으로 돌아오는 佐○대원에게 「전부 돌아왔느냐」묻고는 산장안을 봤더니 前川대원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前川대원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佐○대원으로 표지기 있는 곳에서 그를 본 것이 최후였다.
천정일 대장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대원을 2개조로 나눠 수색작업을 벌였는데 흔적도 없었다. 날씨는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한 대원의 말에 의하면 왕관능 하산도중 중간지점에서 前川대원이 스키스톡을 떨어뜨려 스키스톡 없이 표지기를 행해 내려가는 것을 목격했었는데 그 후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前川대원이 행방불명된 지점에서 산장까지의 거리는 2백m지점이었고 눈은 깊었으나 바람도 없고 시계도 좋은 편이어서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 들었다. 수색작업은 2백m 주위를 스키스톡으로 눈을 헤치며 수색작업을 폈으나 前川군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대원들은 지금까지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으나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당황하고 前川군의 얼굴이 어른거려 조난이 아닌가 하고 걱정에 쌓이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천정일 대장은 2명의 대원을 제주로 보내 前川군의 가족에게 조난소식을 알리고 당국에 수색지원을 요청케 했다. 6명의 대원들은 밤새 문만 삐꺽거려도 혹시나 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밤새도록 기다렸으나 前川대원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채 왕관능 너머로 날이 밝아왔다.

1936년 1월 3일
어제의 사고를 모르듯 날씨는 이 등반대가 제주에 온 이래 가장 청정한 날씨였다. 이날 오후께 제주에서 소방서, 경찰서, 영림서 직원들로 구성된 지원대가 올라왔다. 이날도 문제의 2백m 지점을 중점적으로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허탕이었다. 「도대체 前川군은 어디 있는가, 그 짧은 순간에 우리와 영영 이별을 할 수 있단 말인가」천정일 대장은 수색작업을 벌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막힌 일이다. 2백m지점을 이잡듯 샅샅이 뒤졌는데도 찾을 수가 없으니.

1936년 1월 4일
수색의 범위를 더 넓혔으나 아무런 효과를 못 얻고 서울서 온 前川군 가족들의 권유로 이후 3일간의 수색작업을 벌이다 7일간의 수색만으로 1차 수색을 포기하고 전원 하산했다.
산을 내려오면서도 천정일 대장은 前川군이 살아있을 것만 같은 생각으로 못내 아쉬워하며 산을 내려왔다. 한라산에서 첫 조난사고이고 보니 본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한 제주사람이 무당에게 前川군의 점을 쳤더니 「前川군은 죽은 것이 아니고 귀신이 그를 숨겼다」는 점괘 나왔다고 후일 천정일 대장에게 알려줘 전대원은 제발 그렇게라도 됐으면 하고 바랐다. 천정일 대장은 그때야 처음으로 미신을 믿었고 그후 그는 세계의 권위있는 고고학자가 되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여 지도교사에게 조난보고서를 내자 「해군항공대는 조난당한 비행기의 자그마한 파편을 보고도 그 원인을 찾아낸다는데 자네가 쓴 보고서는 무엇인가」라고 야단을 맞고 1월말 伊○ 대원과 함께 또다시 한라산엘 올랐다. 눈이 많이 왔으나 개미등에는 눈이 많이 다져져 스키로 상쾌하게 올라 산장에 도착, 이번에는 탐라계곡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쾌청하였다. 계곡 중간부근에서의 수색 도중 설비(雪庇)가 붕괴, 눈사태를 일으켜 설연(雪煙)을 이루며 눈이 몰아닥쳤다. 이를 피해 겨우 살아난 두 사람은 처음으로 前川군이 살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수색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1936년 5월 초순, 월요일 아침
前川군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전보가 왔다. 시체는 제주의 어느 유지가 산장부근에서 시체 수색작업을 벌이다가 산장부근의 잔설속에서 前川군의 시체를 발견했던 것이다. 유족과 급히 현장에 도착해보니 前川군은 예상했던 대로 삼각표지 바로 아래 잠자듯이 누워 **버렸다. 처음 수색 때도 바로 옆까지 왔었으며, 산장에서 1백50m지점이었다. 천정일 대장은 시체를 보는 순간 「무엇이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前川군의 마지막 모습을 봤던 왕관능 중간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정일 대장은 그후 30년후에 제주에 와서 한라산에 올라 故前川군의 비석앞에서 그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슬피도 흘렸다. 「무엇이 그대를 데려 갔는가」천정일 대장은 죽으면서 까지도 이를 의문으로 남겼다. 시체가 발견되자 그후 산악인들은 前川군의 사고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스키를 타고 급경사면을 활강, 스키스톡을 떨어뜨려 스톡이 없이 그냥 내려오다 추락, 눈속에 파묻히면서 질식한 것이 영원한 죽음이 된 것」같다고.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의 조난원인은 알 수가 없다. 영원히 한라산의 품속에 안긴 故前川군의 묘비는 현재 용진각 남동쪽 50m지점에 세워져 있으며, 묘비 주변에는 봄이 오면 철쭉과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있어 외로이 잠들어 있는 故前川군의 넋을 위로해 주고 있다. <옮긴이 : 장덕상>

▲사진 : 용진각대피소 동쪽에 세워져 있는 마애가와도시하루의 조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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