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자료실

한라산 조난 그 자취

작성자 정보

  • 제주연맹 작성 2,867 조회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서재철 기자님이 쓴 한라산 조난 그 자취 2번째.

한국산악회(韓國山岳會) 전탁(田鐸)씨 조난(1948년 1월6일~22일)
전탁씨의 조난은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으론 첫 조난사고였다. 그는 특이한 한라산의 기후에 휘말려 귀중한 생명을 잃고만 것이다. 이팀은 한국산악회 제2차 적설기한라산 등반(1차는 학술조사단)을 위해 6개월 전부터 계획을 세워 당시 구하기 어려운 지도를 구하자, 본격적인 대원편성에 들어갔다. 대원은 5명으로 대장 전탁(田鐸), 기상 남행수(南行秀), 대원에 박종대(朴鍾大), 신방현(申邦鉉), 현기창(玄基彰)씨. 이 팀은 한라산의 특이한 기상관측을 위해 인천에 있는 중앙관상대에서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풍속계 등 각종 기계를 빌려 휴대했었다.

1948년 1월 6일.
서울역에서 많은 산악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난 이 등반대는 목포에서 하루를 묵으며 제주아주머니에게 「오돌또기」민요와 갖가지 제주 사투리를 배워 하루를 보낸 다음 1월9일 저녁 제주항에 도착했다. 제주항에는 몇 달 후 벌어질 4.3사건의 전조인지 육지부에서 서북청년(西北靑年)단원들이 제주로 몰리고 있어 검문검색이 심했다. 1월10일. 시내 기관을 찾아보았으며 저녁엔 애국부인회가 주최하는 음악회에 초청되는 등 바쁜 하루를 보냈고 기상관계 조사결과 2. 3일간 약간 흐리겠으나 변화없이 좋은 날씨가 된다는 것이다. 1월11일. 당시 감찰청에서 제공해준 차편으로 관음사까지 갈 수 있어 대원 5명과 포터3명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이 등반대는 사전에 관상대에서 기상조사 의뢰가 있고 해서 기상관측을 최대의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1월12일. 대장 전탁씨의 생일이라 했다. 이 생일이 마지막 생일이 될 줄은 아무도 생각조차 못한 채 등반을 시작했다. 눈이 꽁꽁 얼어있어 큰 곤란없이 옛날 경성제대산악부 팀이 쓰던 개미등 소옥터에 오후 3시께 도착하여 포터들을 돌려보내고 깊은 눈속에 텐트를 설치했다. 가끔씩 눈이 내렸으나 바람은 불지 않았다.

1948년 1월13일.
날씨는 화창하게 개었고 기온은 영하 6도여서 설면(雪面)은 크러스트가 돼 아이젠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보행하기에는 무척 쉬웠다. 짐을 백록담으로 옮기기 위해 두 번 왕복해야 했다. 오르면서 일본인 조난자 마애가와(前川) 조난비에 들러 잠시 묵도를 하고 지형을 익혀두기도 했다. 짐을 두고 내려올 때는 글리세이딩 훈련을 곁들이며 오후4시20분에야 백록담을 굽어볼 수 있는 북쪽 능선에 도착했다. 감격의 순간이다. 화구(火口)는 완전히 얼었으며 귀를 찢는 듯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대원들은 쾌청한 날씨에 기분마저 상쾌하여 스키를 즐겼고 바위마다 얼어붙은 설경이 눈부셨다. 기상담당인 남행수씨는 관측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5시 관측을 마쳤을 때 서귀포쪽의 운해는 석양의 빛을 받아 황홀한 절경을 이뤘다. 「이것이 폭풍설을 몇시간 앞둔 고요한 정경이 될 줄이야 상상조차 못했던 것으로 큰 실책이었다」고 남행수씨는 후일 등반기에서 밝혔다. 백록담에서 스키를 타고있는 대원들은 앞으로 닥쳐올 폭풍설에 대비도 없이 스키만 즐기고 있을 때 해는 이미 산을 넘고 있었다. 서둘러 고사목을 잘라 텐트를 설치하고 레이숀 상자에 얼음을 담아 물을 녹이고 있을 때 어둠과 함께 얼음조각이 서서히 날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광풍으로 변하여 몰아치기 시작했다. 돌변한 기상으로 정상에 설치한 기상관측시설도 회수를 못 할 지경이었다. 밤12시쯤부터는 바람이 본격적으로 몰아쳐 돛배로 만든 텐트가 찢어지면서 쓰러졌다. 6개의 스키로 양측과 중간을 맞붙여 세워 겨우 의존했으나 바람과 함께 몰아친 폭설이 텐트를 억눌러 대원들은 자일로 전대원의 몸을 묶고 밤새 제설작업을 해야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통에 대원들은 한잠도 못 자서 무척 피로해 있었다.

1948년 1월14일
폭풍설은 아침까지 계속되고 몰아친 폭설로 텐트속은 질식할 형편이다. 인절미 죽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대원들은 텐트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밖으로 나왔으나 시야는 4~5m정도 보이고 신설은 50cm나 쌓였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갔던 대원들은 백록담의 폭풍설을 피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대원들은 후일「우리가 텐트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었던 것만도 천만다행이었을 정도로 악천후였다」고 술회하였다. 하루종일 몰아친 폭설은 조금도 걷히질 않는다. 기상을 맡았던 남행수 대원은 정상에 설치해둔 기상관측기 때문에 안절부절이다. 더욱이 이 관측기는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대장의 승낙을 얻어 박종대 대원과 함께 회수작전을 폈다. 눈에 덮인 한량계는 영하15도8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계속되는 폭풍설로 한발자욱도 움직일 수가 없어 텐트속에 머물러야 했다. 텐트속은 식량과 장비, 대원5명이 둘러앉아 밖에서 압축해 오는 눈의 압력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텐트안은 점점 좁아들어 몸을 비틀 틈마저 없었고 공기가 탁해 질식할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이프로 텐트를 +자로 찢어 빈 통조림통으로 환기통을 만들어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로 질식 일보직전에서 구해줬다. 그 공기의 맛이란 달고 싱그러웠다. 그러나 계속되는 눈의 압력은 더 지탱할 수가 없어 교대로 밖으로 나가 텐트를 누르는 눈을 치웠으나 반대로 텐트속의 습도는 내의까지 젖어 들었다. 그러다가도 밖에 나와 눈을 치우고 들어 올때면 옷은 철판같이 굳어지고 손발이 마비되는 듯 차가워 서로 비벼주며 밤새 눈의 압력과 싸우며 잠과 피로를 잊었던 지루하고 긴밤이었다. 이 팀의 조난의 원인이 됐던 피로도 연 이틀간의 불면이 큰 이유가 됐었다는 후일 많은 산악인들의 얘기였다.

1948년 1월15일.
악몽과 같은 긴밤을 보냈으나 강풍과 눈은 계속 내렸으며 시야는 어제보다는 좋아진 편이다. 대원들은 동상이 염려가 되어 운동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안경을 낀 전탁 대장에게는 눈보라가 치명상이 됐다. 날씨가 개일 것 같지 않자 서귀포쪽으로 하산하기로 결정하고 눈속에 파묻힌 장비 등을 파냈고 텐트만은 남겨둔 채 짐을 옮겼다. 후일 그들은 「서귀포쪽 코스로 오던 날 즉시 정찰을 못 해 두었기 때문에 이 팀에는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산악기상에서 특히 변동이 심한 한라산에서 이런 실수란 등산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것이다. 아침식사는 불가능하여 바람이 막힌 서귀포쪽에서 하기로 하고 하산을 서둘러 백록담 남쪽을 올랐으나 굳어진 적설위에 신설이 1백50cm나 쌓여 오르막길의 전진은 막대한 체력소모를 가져왔다. 모두가 사경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었고 결사적인 마지막 힘을 쏟았다. 코스를 찾아 헤매다 아슬아슬한 남벽위에 매달려보기도 했으나 체력과 시간만 소모 됐을 뿐 눈보라 속에서의 탈출구를 못 찾았다. 「몇년후 한라산 남벽을 또 한번 봤을 때는 그때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당시의 한 대원이 산악잡지 등반기에서 밝혔다. 코스 찾기를 포기하고 잠깐 쉬며 마른 떡으로 요기를 하여 다시 백록담으로 돌아와 용진각코스로 하산키로 했다. 여기서도 백록담에서 북벽을 오르는데는 보통날은 10분이면 오를 것을 1시간이나 소요했고 능선에 올라서자 센바람이 불어 현기창 대원은 륙색을 맨 채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더 이상 오르다가는 숨통이 막힐 지경으로 취설(吹雪)이 몰아쳤다. 겨우 북벽을 조금 올라섰을 때는 시야도 막히고 깊은 눈속에서 방향감각마저 잃어 긴장감과 불안감이 덮쳐와 자신도 모른 사이에 대원들은 당황했다. 어디로 내려가는지 조차 모르고 6-7백m 내려오다 눈을 파고 스키를 세워 담요를 걸치고 피란노영을 했다. 식사를 하려했으나 라이터가 제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따뜻한 식사는 생각할 수가 없이 날은 점점 어두워 갔다. 옷들은 얼었고 설동(雪洞)속은 비좁았지만 지난밤 텐트 속같이 눈에 눌리지는 않았다. 종일 식사 한끼도 제대로 못하였고 수면부족과 극도의 피로 때문 엄습해오는 잠을 이기기에는 또한번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눈은 계속 쏟아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으나 설동속은 고요했다.
그런데 가끔씩 전탁 대장의 헛소리가 들렸다. 서로가 깜박 졸다가 영원히 설동속에서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꼬집으면 잠을 깨웠으나 워낙 피로해 있을때라 모든게 귀찮아졌다. 악몽 같은 밤을 보내고 나자 전탁 대장과 몇몇 대원은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1948년 1월 16일.
13년전 현재 이팀이 있는 위치 바로 아래서 일본인 마에가와(前川)가 조난 당했었다. 이팀은 한라산을 오기전에 이미 前川조난의 기록을 너무나 세밀히 조사하고 왔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에도 조심을 하고 있었으나 이미 그 경로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키슬링과 몇벌의 스키를 버리고 귀중한 장비와 식량만 가지고 급속히 하산을 서둘지 않으면 안될 다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3백m쯤 내려왔을 때다. 바위사이에 꽂혀있는 커다란 표식기를 발견하고「여기가 완관능이다」고 소리를 지르며 부둥켜안고 울어버렸다. 이제는 방향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잡은 듯 용진각으로 하산을 계속했다. 전탁 대장도 비틀거리면서도 열심히 걷고 있으나 가끔 의식을 잃은 듯 「南兄 올라가자」며 헛소리를 계속했다. 전탁 대장은 여전히 「후생관 3층(이곳은 등산계획을 세웠던 곳)으로 가자」헛소리를 하면서도 의식을 찾으려고 스키스톡으로 어깨를 때려달라고 부탁도 했다. 코스는 제대로 찾아들어 캠프장인 현 용진각(勇進閣)자리까지 왔으나 폭설로 지형을 분간할 수가 없게되어 편히 쉴 장소를 못 찾았다. 바람도 없이 너무나 고요했다. 13년전 그날도 이렇게 고요하였었다. 대원들은 느끼고 있다. 뭔가 일순간 스치는 불안감을. 그러기 때문에 당황했다. 비스켓과 캔디 등으로 허기진 배를 요기했으나 피로는 풀리질 않는다. 이미 전탁 대장의 얼굴엔 생기를 잃은 표정이었다. 개미등으로 하산을 시도하여 삼각봉 트래바스를 시작했으나 전진은커녕 계곡쪽으로 흘러 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만했다.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이 코스를 탐라계곡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대원중 제일 기운이 남아있는 현기창씨와 신방현씨에게 스키를 신고 먼저 내려가 구조대를 요청해 오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대원은 전탁 대장을 부축하여 탐라계곡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눈 덮인 계곡을 내려가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슴을 넘게 빠져 허우적거리고 올라오면 또 빠지기를 몇 번. 바지는 얼음과 눈덩이로 두툼하여 중압감을 주고 목은 타올라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수십번 들었다. 전탁 대장은 이젠 전혀 발조차 옮겨 놓지를 못하고 끌려가는 신세가 됐으며 날은 점점 어두워간다. 교대로 전탁 대장을 흔들며 운동을 시켜서 일각의 여삼추 기분으로 구원대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야호」소리를 질렀으나 메아리만 돌아올 뿐 영영 회답이 없었다. 田대장도 헛소리로 「야호」하고 마지막으로 살려달라는 듯 애원의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바람결에 소리가 흩어지고 만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으나 연 사흘동안 못잤기 때문에 저절로 눈이 감겨 자꾸만 포근하고 아름다운 신비로운 환상의 꿈나라로 말려 들어가고 있다. 동사(凍死) 직전으로 다가서고 있음이 분명했다. 애타게 부르는 「야호」소리도 아무 반응이 없어 선발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밤9시경 田대장은 마지막인 듯 몸을 약간 움직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행수씨는 혹시나 생명이 마지막 순간인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어 확인해보려고 했으나 장갑 낀 손목둘레에 얼름테가 생겨 장갑이 벗겨지지 않아 박종대씨가 호흡과 맥박을 확힌한 결과 이미 싸늘한 채 굳어져 있었고 크게 뜬 눈빛만이 애절하게 무언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바로 눕히고 눈을 감겨 주었다. 애타게 불러본 「야호」그 한마디가 田대장 생전의 마지막 음성이 될 줄이야. 이 시각이 저녁9시 생사를 같이 했던 친구의 운명을 지켜 본 비통한 마음과 그 길고 긴 밤이 또한 두 대원에게도 엄습해 오는 죽음을 향한 환상은 그의 운명의 쇼크로 정지되었으나 이 번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릴 일들을 생각할 때 비통함은 더해 왔다. 그 곳의 지형을 몇 번이고 익히고 스키스톡을 거꾸로 꼽아 표시를 한 후 설동을 파고 찬바람을 피하려고 했으나 너무 얕아 들어 설 수가 없어 캔디 몇조각씩 먹고 서로 몸을 비벼가며 추위를 견디어 봤으나 옷이 너무 얼어 마른 장작 두들기는 기분 뿐이었다. 또다시 졸음이 엄습해 왔다. 박종대씨가 졸기 시작했다. 밤이 깊도록 서로 깨우며 구원대에게 보내는 「야호」소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사라졌다.

1948년 1월17일.
얼마나 피곤했던지 모진 추위와 친구의 시체 옆에서 약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운명을 달리한 田대장이 지켜봐 준 덕택인지 두 대원은 지루한 악몽의 밤을 무사히 지내 또 하루가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고 바람은 조금 잔 듯 했다. 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의 시체 곁을 떠나 하산하려 했으나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시체 곁에 스키스톡을 깊숙이 박고 표식을 하여 오후에 시체를 하산시킬 예정으로 계획하고 두 대원은 하산을 시작하여 7백m쯤 내려왔을 때 계곡아래 눈속에서 두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먼저 선발대로 보냈던 신방현, 현기창 두 대원이 설동속에서 밤을 지냈던 모양이다. 이 두 대원은 어제 하산 중 탐라계곡 3폭포(현재4폭포)에 막혀 하산할 수가 없어 설동속에서 비박을 했었는데 지난 밤 「야호」소리도 들렸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것이다. 이 두 대원에게 울먹이는 소리로 田대장이 지난밤 불귀의 객이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두 대원은 말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얼굴과 손들이 동상에 걸렸고 피골이 상접한 표정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남행수 대원이 고인이 된 田대장을 대리하여 지금부터의 할 일을 설명하고 먹을 것을 찾았으나 겨우 비스켓 두조각 뿐이었다. 하산을 하기 위해 서둘렀으나 박종대 대원이 눈위에 쓰러진 채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다. 특별히 배급되는 초코렛까지 거부하면서 몹시 괴로워하였다. 어젯밤 너무 고생을 하였고 식사까지 못하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잘 견디어 주었다. 후일 어떻게 견딜 수가 있었냐고 묻자 「아침에 마늘 한조각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 거리다 삼켜버려 위를 자극 시켜서 견딜 수가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마늘 한조각이 그의 일행을 살릴 수 있는 명약이 되어 준 것이다. 이것은 의학적인 근거는 알 수 없지만 기억해 둘 비상조치 법이다.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서 3단폭포를 빠져 나오는 데는 눈과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벽옆을 픽켈로 스텝커팅을 하면서 폭포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설경은 최절정이었지만 바라볼 기운도 없이 부지런히 걷기만 하고 있지만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무척 피로한데다 식사까지 못하였으니 걸음걸이가 지그재그였다. 눈은 멎었으나 구름은 잔뜩 끼었고 아침9시에는 관음사까지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오후1시가 되도록 숲속만 방황하고 있었다. 앉아서 쉴 때면 대원들은 뜨끈한 밥과 동치미를 실컷 먹고 푹 잤으면 하는 얘기를 수십번 한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오후3시가 되어도 숲을 못 빠져나가고 계속 방황만 하고 있는 것이다. 구름이 약간 걷히자 삼의양오름이 보여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날은 벌써 어두워가고 있어 대원들은 또 한번 실망에 잠기고 있었다. 시각은 원근의 구별조차 힘들었고 눈에 빠져 나뭇가지에 걸리면 발을 빼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밤 8시경 송림숲까지 빠져나와 그런데로 걷기는 편했으나 기운은 점점 빠져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행히도 바로앞에 돌담이 나타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시켜주자 전대원은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 더욱 발길이 무거워졌다. 밤9시에 관음사에 도착했다. 탐라계곡에서 15시간이나 걸려 관음사까지 그것도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대원들은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버렸다. 얼마 후 불을 피워 구두끈을 녹여 신발을 벗었을 때 발들이 너무도 맑고 깨끗했다. 심한 동상에 걸려 있는 것조차도 몰랐을 정도였다. 이들은 겨울 한라산에 대한 지식이 너무도 부족했다고 생각하며 우선은 살아난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겼다. 등산을 시작하여 3일만에 따뜻한 음식을 대하게 됐으나 입의 욕구에 브레이크가 걸려 그렇게 먹고 싶던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대원들은 따뜻한 음식을 먹자 누가 먼저이고 없이 자리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꿈조차 꾸지 못할 깊은 잠에 빠졌다. 18일. 얼마나 잤는지도 모른다. 「눈을 떴을 때 옆에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잇는 것 같았다」고 남행수씨는 말했다. 손, 발, 얼굴이 온통 부어 올라 누구인지 조차 분별할 수가 없었고 옷을 보고야 알아봐 오랜만에 전대원이 웃음을 보였다. 거동하기도 힘이 들었으나 식욕은 되찾아 왕성했다. 얼마나 먹고 싶던 밥이었던가. 이날 하루도 거의 보내고 사람을 시켜 감찰청에 조난보고를 냈다. 19일 조난보고를 받은 감찰청에서 기동대원 10명과 소방대원 10명으로 구성된 구호대가 도착하여 두 대의 트럭에 실려 도립병원으로 직행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어느 서울 유학생의 어머니가 알지도 못하는 이 대원들에게 저녁밥을 지어다 줬고 밤늦게 도지사를 비롯한 각 기관장이 위문을 와 주었다. 「이번 등산을 통해 동계등반의 체험과 한라산의 기상, 식량, 장비 등을 과학적으로 조사연구하고 한라산을 널리 소개하고자 한 것이 오히려 도민들에게 누를 끼치게 됐다」고 대원들은 보고회에서 말했다. 밤이 깊어갔다. 창 너머로 별이 빛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코디언의 멜로디가 흘러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탐라계곡에 홀로 잠자고 있는 田鐸 대장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잠들을 이루지 못했다. 방송에서는 이번 폭설은 40년대 처음이었으며 15일 오후4시경은 최대풍속이 초속32m였다니 한라산에서 현기창 대원이 날릴 때 그 순간이었으리라. 또한 산지항에 정박중이던 미군 수송선에서도 두 군인이 바람에 날려 익사한 사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차츰 몸이 회복되어가자 고인이 된 田鐸 대장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22일에야 서울서 한국산악회 구원대와 유족이 도착하였다. 마중나간 대원들을 부둥켜안고 비통함을 터트렸는데 목메임과 울먹이는 소리로 부두가를 꽉 메우는 것 같았다. 고인의 동생은 말문도 못 연 채 형이 묻혀있는 한라산만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원들도 지금까지 억눌러있던 슬픈 감정이 구원대를 만나자 한꺼번에 터진 듯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부두는 온통 울음바다였다. 이들을 지켜보던 사람들 마저 눈시울을 적셨다. 구원대가 도착한 후에도 계속 폭설이 내려 도저히 시체 인양작업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후에 인양키로 하고 제주를 떠나기로 했다. 그동안 돌봐줬던 유지들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30일 영원히 잊지 못할 제주를 떠났다. 시체는 그 후 3월15일 현지에서 화장하였고 그 유골은 관음사에 안치했었으나 안치 18일만에 발생한 4.3폭동으로 관음사가 불타 없어지자 故田鐸씨의 유골도 함께 불타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또한 故田鐸씨는 한국인으로 첫 조난사고인데도 조난비 마저 없는 실정이다. 한라산 어느 한 모퉁이에는 그의 영혼이 맴돌고 있으니 어느 곳에 누군가가 조난비라도 세워줬으면 그의 영혼을 편안히 잠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 첨부사진은 선발대가 구조요청차 하산하다가 길이 막혀서 비박한 동탐라골 4폭포

<옮긴이 : 장덕상>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